길재(吉再)는 고려 1353년(공민왕 2)에 출생하여 1419년(세종 원년)에 서거한 고려 말·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며, 고려 말의 유종(儒宗)으로 평가받던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고려 왕조의 명운이 다할 것을 예견하여 일찌감치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기에 정치적으로 그가 세운 업적은 많지 않으나, 패망해가는 고려에 대하여 절의를 지켰던 그의 삶은 조선 왕조 지식인들에게 큰 감명을 남겼다. 오늘날 학자에 따라 그를 빼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길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과 함께 삼은으로 통칭되며 충의(忠義)의 화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길재는 1353년(공민왕 2) 경상도 선산(善山) 봉계리(鳳溪里)에서 길원진(吉元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성균관 생원(生員)이었던 길시우(吉時遇)이며, 조부는 산원동정(散員同正) 길보(吉甫)이다. 어머니는 토산(兎山) 김씨(金氏)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증조부와 조부의 관력(官歷)을 통해 미루어 볼 때, 길재는 고관(高官)을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경제적 형편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재가 8살이 되던 해에 길원진이 보성대판(寶城大判)에 임명되자 그의 어머니는 봉록이 넉넉지 않아 생활이 어려울 것을 염려해 외가에 그를 맡기고 남편을 따라갔다. 어린 나이에 가정형편 때문에 어머니 품을 떠나야 했던 길재는 우연히 길 잃은 자라를 발견하고는 자라에 빗대어 자신의 외로움을 노래하였다. 길재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의 노래가 너무나 절절하였기에 이것을 들은 길재의 외조부모와 동네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0세가 되던 해인 1362년(공민왕 11)부터 길재는 냉산(冷山)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고려사회는 유학자들 사이에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는 있었으나, 양자 사이에 뚜렷한 벽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많은 학자들이 유교와 불교 경전을 함께 섭렵하였으며, 유학자와 승려 사이의 학문적 교류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길재 또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불교계를 통해 글을 배웠다. 8년 뒤 길재는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비(朴賁)의 밑에서 논어와 맹자를 읽으며 비로소 성리학(性理學)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학문에 좀 더 욕심을 갖게 된 길재는 개경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가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기로 결심하였고, 이색·정몽주·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길재는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이로부터 9년 뒤인 우왕(禑王) 9년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서 4등을 차지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 다음해에는 금주(錦州)에서 지방관으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무덤 옆에 여묘(廬墓)를 짓고 충실히 삼년상을 마쳤다. 성리학의 보급 이후 고려에서는 가례(家禮)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비로소 유교적 상장례인 삼년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길재의 효행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년상이 끝나던 해인 1386년(우왕 12), 드디어 길재는 스승인 이색과 염흥방(廉興邦)이 주관하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급제하여 이색의 문생(門生)이 된 사람으로는 맹사성(孟思誠)·심온(沈溫)·조연(趙涓)·정곤(鄭坤)·신원필(申元弼)·정구진(鄭龜晉)·서유(徐愈) 등이 있다. 우왕은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한 길재에게 곧바로 청주사록(淸州司錄)을 제수한다. 하지만 길재는 부임하지 않았고, 후에 조선 태종[조선](太宗)이 되는 이방원(李芳遠)과 같은 마을에서 교유하며 독서에 심취하였다.